
**의도치는 않았지만 약간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개봉 전부터 70대 노인과 10대 여고생의 사랑을 다뤘다 하여 포털 사이트 뉴스 기사를 도배했던 <은교>. 박범신 작가의 소설이 원작인데, 주위에서 다들 책을 강력추천 하길래 책을 먼저 읽고 영화를 봤다. 영화관에 들어가는데 관객 중 할아버지 몇몇 분이 눈에 띄었다. 영화를 본 곳이 종로라 나이드신 분들이 많았을 수도 있지만, 영화의 스토리를 알고보니 괜히 한 번 더 눈길이 갔다.
영화의 첫 장면은 이적요 시인이 은교를 처음 '발견'하는 장면이었다. 책을 읽을 때 그 장면을 세세히 묘사한 작가의 필력에 감탄했는데 그를 그대로 영상으로 옮기기엔 무리였나보다. 뭐, 원작을 그대로 영상으로 옮기라는 법도 없지만. 첫 장면에서 살짝 실망한 채 영화 관람.
김고은, 아니 은교는 싱그러웠다. 달리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은교는 제 젊음을 날 것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는데 마치 방금 잡아올려 팔딱팔딱 뛰고있는 활어마냥 힘이 넘쳤다. 원작과 영화가 많은 부분 다른 점이 있는데 적어도 내가 상상했던 은교의 '이미지' 만큼은 김고은이 갖고 있는 외면과 비슷했다. 틀에서 나온 듯한 전형적인 미인들만 득실대던 우리나라 배우 시장이었는데 오랜만에 '이런 식으로' 예쁜 배우가 등장했다. 스승의 뛰어난 재능을 갈망하다 열등감에 사로잡히는 서지우 역의 김무열 역시 기대 이상의 연기를 보여준다.
이적요 시인을 맡은 박해일은 특수분장을 거쳐 70대 노시인으로 거듭났는데, 목소리 톤은 할아버지의 것과 달라서 감정 이입이 힘들었다. 왜 70대 배우를 캐스팅하지 않고, 30대 배우를 분장시켜가며 주인공으로 낙점한걸까. 정지우 감독은 영화의 원작인 박범신의 소설을 읽으며, 나이가 든다는 것은 “마음에 청춘이 있으나 껍데기가 늙어가는 것” 같다고 느꼈고, 젊은 배우의 노인 분장이 그 관점을 부각시킬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고 말했다.(인터뷰 원문 http://movie.naver.com/movie/mzine/read.nhn?office_id=140&article_id=0000020239) 이적요가 은교의 무릎을 베고 상상 속에서 그녀와 섹스하고 이내 현실로 돌아왔을 때 마음은 아직 젊으나 현실의 껍데기가 늙은 처연한 감정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너희 젊음이 너희 노력으로 얻은 상이 아니듯, 내 늙음도 내 잘못으로 받은 벌이 아니다."
이적요 시인은 인생의 쓸쓸한 단면을 보여준다. 사람은 누구나 죽고, 이 사실을 대부분의 사람들이 안다. 그렇지만 '늙는다는 것'은 어떨까. 그동안 늙은 사람을 볼 때면 무언가 안타까운 마음이 들고, 연민 비스무리한 감정도 들었는데, 오히려 늙은 사람들은 자신을 그렇게 보는 시선 자체가 부담스러웠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체력이나 외형이 다를지라도 젊은 사람들과 같이 감정도 느끼고 욕망도 가지고 있는데, 우리는 이들을 단지 늙었다는 이유로 타자화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내 보통의 시선이 혹시 나이많은 사람들을 찌르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돌아보게 됐다.
보면서 작년에 들었던 시쓰기 수업이 생각났다. 시를 쓴다는 건 지금 이 감정에 맞는 신선한 낱말을 고르고, 나만의 감성으로 채워넣는 숭고한 행위다. 짧은 줄글이지만 거기엔 시인의 인생이 녹아들고, 우리는 시를 읽으며 세상을 달리보는 눈을 키우게 된다. 은교가 이적요 시인에게 마음을 열게 되는 계기 역시 시를 통해서다. "뾰족한 연필은 슬픈거"라고 알려주는 시인 할아버지를 통해 은교는 한 뼘 더 성장한다. 은교가 수업을 듣던 중 연필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필통을 흔들어 '달각달각'하는 연필의 울음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장면은 영화에서 가장 마음에 와닿았다.
<은교>가 노출 수위, 주제의 선정성 등에 초점이 맞춰지고 있어 이를 기대하고 영화를 보러가는 사람들도 많겠지만, 내가 봤을 때 이 영화는 야하다기보단 오히려 쓸쓸한 느낌이 많이 든다. 영화에선 총 두 번의 정사신이 나오는데, 노출 수위가 상당하지만 꼭 필요했던 장면이었다. 영화도 보지 않고 다짜고짜 욕부터 해대는 사람들이 많아서 조금 아쉽다.
이적요 시인은 은교에 대한 소설을 집필하고, 은교는 이를 통해 자신이 얼마나 예쁜 아이인지 알게 된다. 별이 다 같은 별이 아니고, 내가 갖고 있는 사물이 한낱 공산품에 불과하더라도 내겐 사연있는 그 물건들의 가치를 알아주는 사람, 그 누군가 나를 예쁘고 탁월한 문장으로 묘사해준다면 난 정말 사랑에 빠질 수도 있을 것 같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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